경제학 법칙 가운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 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는 용어가 있다. 과거 동이나 은을 화폐로 사용하던 시절, 정부는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화폐의 질을 떨어뜨리곤 했다. 가령 10원짜리 은화는 10원 가치의 은이 포함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5원어치의 은만 함유된 채 10원짜리 역할로 통용되기도 했다. 이럴 경우 온전히 10원의 가치를 지닌 은화(양화)는 저장해두고 5원의 가치를 지닌 화폐(악화)만이 쓰이게 되어 나중에는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아직도 선의의 목적이나 방법이 악의적인 방법에 의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우 곧잘 인용되고 있다.

최근 들어 기업들은 실시간 기업(RTE, Real Time Enterprise)이나 차세대 시스템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데이터 품질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새로운 신규 시장으로서의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바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데이터 통합 전문 업체인 A사는 3개 보험사들의 데이터 품질을 측정하는 테스트 작업을 진행했다. 잦은 설계사의 이직과 데이터 관리 부족으로 데이터 오류가 많을 것이라는 당초의 우려와 달리 98% 가량의 높은 데이터 정합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입력된 데이터가 상당히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테스트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제점이 발견됐다. 상당수의 데이터가 동일한 중복 데이터라는 것이다.

동일한 고객 데이터가 입력 형태만 달리하여 50여 차례 저장되어 있기도 했다. 이는 보험 설계사가 자신의 정보를 다양한 형태로 바꿔 입력한 결과이다. 아파트를 APT 또는 @로 표시하거나 주소표기에서 띄어쓰기를 의도적으로 달리하는 방식 등으로 수차례 입력한 것이다. 실제 고객의 정보(양화)는 개개인의 수첩이나 엑셀 파일에 머물러 있고 시스템에는 형태만 달리한 자신 혹은 지인의 정보(악화)만이 흘러가는 것이다.

모 자동차 회사에서도 최근 실제 차량의 소유주를 파악하기 위해 정비센터를 통해 고객 정보를 확보하는 방안을 시험했다. 자동차 회사는 구매자 정보를 확보하고 있으나 자동차 교체 고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실제 운행자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정비센터에 데이터 입력을 위한 시스템을 갖추고 정보 입력 시 포상을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큰 결실은 없었다. 이번에도 주로 정비센터 직원들의 정보만이 확보된 것이다. 결국 이 방법은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에서 폐기됐다.

차세대 시스템이나 전사 데이터 통합은 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투자가 불가피한 요소들이다. 이러한 투자가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기업의 비전 공유는 물론 개개인의 실적 및 생산성 증대 효과를 전사적으로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IT투자의 낮은 ROI는 바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습이 빈번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규모 시스템 투자에 앞서 사내 문화와 프로세스를 점검하는 것은 양화의 힘을 북돋아주는 출발점이다.
<이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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