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성장 기다리는 의료 AI업계, “기술력은 준비 완료”

[아이티데일리]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수준의 의료 서비스 체계를 갖추고 있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의료진들과 인프라, EMR을 위시한 선제적 디지털 기술 활용, 국민건강보험에 기반한 높은 의료 접근성 등은 독보적인 수준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의료산업계 위에서 국내 의료 인공지능(AI) 서비스 기업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잘 갖춰진 의료 데이터들과 AI 역량을 결합해 의사들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돕고 진료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서비스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빠르게 성장하는 의료 AI 기술력에 비해 정부와 시장의 반응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① 디지털화 완료된 의료업계, AI 개발 ‘기회의 땅’
② 너무 뛰어난 의료환경, 오히려 AI 시장 성장 저해


민감한 진료기록 활용은 여전히 어려워

다만 의료 분야의 데이터 확보가 모든 점에서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환자의 진료기록을 포함한 개인의료정보(PHR, Personal Health Record)는 매우 민감한 데이터이기 때문에 공개와 활용에 분명한 제한이 따른다. 이에 따라 의료 분야의 데이터들은 공공데이터 개방을 통해 공개된 것 이외에는 확보가 어렵다.

국내에서 마이데이터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의료 AI를 개발하는 기업들은 PHR을 포함한 의료 데이터들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보건복지부 역시 의료 마이데이터 시스템 ‘마이헬스웨이’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면서 이같은 기대를 북돋았다. 마이헬스웨이는 올해 하반기에 시범 공개(CBT)를 실시하고, 내년 중순까지 플랫폼 구축과 실증을 추진한다. 하지만 지난 5월, 보건복지부는 마이헬스웨이 시범 공개 및 플랫폼 구축‧실증 단계에서 민간기업의 참여를 제한했다. 이는 의료법 21조 2항에 따라 환자 개인의 진료정보를 민간기업에게 공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보건복지부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의료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국회 통과 목표는 2024년이다. 민간기업들이 마이헬스웨이 플랫폼이 담고 있는 다양한 데이터들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내후년까지 기다려야 하는 셈이다.

보건복지부가 구축하는 ‘마이헬스웨이’ 구성도
보건복지부가 구축하는 ‘마이헬스웨이’ 구성도

병원들이 정보 공개에 소극적인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지난 2020년 1월에 데이터 산업계의 숙원이었던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 같은 해 8월부터 본격 시행됐다. 이를 통해 개인정보보호법에 ‘가명정보’ 개념이 신설됐고, 민감한 개인정보도 비식별화를 통해 데이터 주체를 특정할 수 있는 이름·주민번호와 같은 식별자(Identifiers)를 제거하면 가명정보로써 연구나 통계작성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선 병원들은 내부에 보관하고 있는 환자 진료기록 등을 외부로 공개하는 것을 꺼리는 모양새다.

업계 관계자들은 병원이 데이터 공개를 꺼리는 이유를 두 가지로 분석했다. 먼저 진료기록의 비식별화가 어렵다는 점이다. 민감정보의 비식별화는 서로 다른 데이터들을 결합하더라도 재식별화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진료기록은 정밀한 의료기구로 측정한 환자의 민감정보들을 가득 담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식별자를 제거하더라도 완전한 비식별화가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한 업계 관계자는 “폐를 촬영한 CT 영상 데이터는 폐의 형태와 표면만 봐도 환자 특정이 가능하다. 환자의 이름이나 환자번호와 같은 식별자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X선, CT 영상 등의 의료 데이터는 비식별화가 까다롭다. (출처: 딥노이드)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과거 진료기록 중 오진이 발견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의료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진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최선의 절차에 따라 진단과 치료를 진행했더라도 오진의 가능성을 없앨 수는 없다. 외부 기관이 과거의 진료기록을 공개하고 살펴보는 과정에서 오진이 발견된다면 병원의 이미지 추락과 법적인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비록 정당한 이유는 아니겠으나, 이는 병원 입장에서 과거 진료기록을 공개하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뛰어난 의료환경이 AI 시장 성장 저해

한편 국내 기업들은 우리나라의 뛰어난 의료환경이 오히려 의료 AI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우수한 의료인력과 의료 인프라, 디지털 기술에 대한 접근성, 방대한 의료 데이터, 국민건강보험을 통한 낮은 의료비 부담 등 세계적인 수준의 의료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의료 AI 산업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의료인력과 인프라의 수준이 높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의 의료체계 안에서도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AI를 활용해 95% 확률로 특정 질환을 찾아낼 수 있는 제품이 개발됐다고 하자. 이런 제품은 의료 수준이 낮고 인프라가 부족한 최빈국이나 개발도상국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AI의 도움 없이도 해당 질환을 95% 이상의 확률로 찾아낼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인간 의사와 차별화되는 독보적인 장점을 갖추지 않는 이상 굳이 AI 제품을 도입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도입 비용이나 AI의 책임 문제 등을 고려했을 때 부정적인 결과만을 남길 수도 있다. 세계적인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갖춘 국내 시장에서는 의료 AI가 갖춰야 할 성능에 대한 기대치가 무척 높고, 이는 의료 AI를 개발하는 기업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온다.

두 번째 문제는 국민건강보험의 존재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은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낮춰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높이고 있다. 뛰어난 AI 기술을 활용해 의료 서비스에 소요되는 비용을 줄인다고 한들 환자 개개인이 체감하는 의료비 부담에는 큰 변화가 없다. 병원 입장에서는 굳이 큰 비용을 들여 환자의 만족도에 공헌하지 못하는 제품을 도입할 이유가 없다.

OECD가 공개한 국가별 의료수가 비교 (출처: OECD)

국민건강보험이 야기하는 또 한 가지 문제는 AI 기반의 의료 서비스에 맞지 않는 의료수가 체계다. 국민건강보험은 개인에게 의료비 부담을 지우지 않는 대신 공단이 의료수가의 많은 비중을 부담한다. 건강보험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지급할 수 있는 의료수가에 한계가 있고, 새로운 의료 AI 서비스에 의료수가를 나눠주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 지급되고 있는 의료수가를 줄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의료수가는 이미 상당히 낮은 편이다. OECD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의료수가를 100점으로 놓았을 때 우리나라는 48점에 불과하다. OECD 평균은 72점, 정부에 의한 완전 무상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국은 83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섣불리 건강보험료를 인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AI 기반 의료 데이터 라벨링 솔루션 ‘메디라벨(MediLabel)’을 개발한 인그래디언트의 김주성 부대표는 “보건복지부가 작년에 공개한 보고서를 살펴보면 의료 AI 산업 생태계가 겪고 있는 문제와 그에 대한 대응책, 향후 개선해나갈 방향 등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공에서도 의료수가의 현실화를 포함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글로벌 제품들과 첨예하게 경쟁하고 있는 의료 AI 기업 입장에서는 국내 비즈니스 환경이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석철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공공의 명확한 메시지가 의료 AI 시장을 움직인다”
홍석철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겸 건강금융연구센터장, 웰시콘 대표


우리나라는 혁신적인 의료 AI 서비스를 만들기에 좋은 조건들을 다수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의료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국내 기업들은 이미 글로벌 기업들과도 경쟁할 수 있는 우수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그에 반해 국내 의료 AI 시장의 변화는 더디다. 금융업계가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금융은 산업적인 가치가 크고 정부의 방향성 제시와 민간의 호응이 맞아들어가서 빠르고 효과적으로 진행됐다. 반면 의료업계는 혁신적인 AI 서비스 개발이나 데이터 개방과 공유 등에 대해서 얘기하면 업계 자체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민감한 개인정보, 생명을 다루는 기술의 안전성 등이 주요 이슈다.

하지만 개인정보나 안전성에 대한 문제는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에도 있었던 문제다. 창고에 쌓아둔 진료기록에서도 정보가 유출될 수 있고, 아무리 뛰어난 의사도 오진을 범할 수 있다. 그래서 최대한 그런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혹여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큰 문제로 번지지 않도록 새로운 법을 만들고 피해를 구제해왔다. 자동차로 인해 매년 사람이 다치고 죽어나가는데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프로세스가 갖춰져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최근 심평원에서 새로운 의료수가를 도입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이 첫 걸음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의료 시장에 대해 잘 만든 의료 AI 서비스를 인정하고 적합한 보상을 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첫 걸음이 반대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시장은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의료 AI 시장을 넓히고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공의 메시지가 명확해져야 한다. 새로운 기술들을 제도 안으로 받아들일 의지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단호히 대처해나가겠다는 메시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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