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클은 얼마 전 CRM 넘버 1 업체인 시벨 시스템즈를 58억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오라클은 이번에도 연초 피플소프트(103억 달러) 인수에 이은 또 한건의 대형 인수합병을 성사시키는 놀라운 수완과 막강한 자금력을 선보였다.
오라클의 연이은 인수합병은 애플리케이션 부분 최강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아낌없는 투자이고, 그 속내를 보면 '타도 SAP'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시벨 인수 발표 직후 오라클은 "시벨 인수로 4천의 고객과 34억 달러의 매출을 추가 확보해 CRM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SAP AG를 밀어내고 오라클이 넘버 1의 벤더가 됐다"고 밝힌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피플소프트 인수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은 적대적인 인수였던데 비해 이번 시벨 인수는 시벨 경영진 및 주주들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인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시벨 제품이 오라클 DB 및 제품군과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 통합 부담 역시 크게 낮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결국 오라클의 시벨 인수는 상당한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는 것이 관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한편 시벨 인수의 가장 큰 목적이자 공략 대상인 SAP는 당초 기대와는 달리 매우 차분한 분위기이다. SAP는 인수보다는 기존 시스템의 트랜스포메이션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 통합된 단일 플랫폼으로 '넷위버' '마이 SAP ERP' 비전 구체화와 저변 확대에 주력하고 있는 분위기다. 연초 SAP는 유통 ERP 전문업체인 리텍 인수에 나서기도 했으나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한 결정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리텍은 6억7,000만 달러에 오라클에 인수됐다. SAP는 기존 개별적으로 구축된 기업 시스템(회계/물류, 인사, CRM, 문서관리 등)으로는 비즈니스 변화와 업무 효율화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보고, 하나의 단일 플랫폼으로 넷위버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객 대응 시간을 줄이고 제품 출시 라이프사이클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전은 오라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SAP에 넷위버가 있다면 오라클에게는 차세대 제품 스위트를 위한 비전인 퓨전이 있다. 두 개념 모두 서비스 기반 아키텍처(SOA)를 바탕으로 한 통합 플랫폼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식에서 SAP와 오라클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ERP를 기반으로 다양한 기업용 시스템을 통합해 가는 데 있어 SAP는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전환해 가는 방식이라면, 오라클은 각 기업 시스템의 구성요소(가령 시벨로 대표되는 CRM)를 인수해 자사 제품군으로 편입시키는 다소 인위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떤 방식이 더 유용한지는 아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개별 구축된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커져가고 있는 시점에서 대표적인 SW 기업들인 SAP와 오라클이 경쟁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으니 고마울 뿐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양사는 접근방식을 달리한 채 고객들의 고민 해결과 환심 사기에 온 역량을 모으고 있다. 치열한 시장 경쟁 구도가 선순환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론적으로 SOA를 기반으로 한 통합된 단일 플랫폼은 향후 기업 시스템이 나아갈 방향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 필요성은 매우 높지만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SAP의 경우 넷위버를 발표한지 2년 가까이 됐지만 아직까지 고객들의 저변을 크게 확보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기존 R3에서 마이 SAP ERP로 전환한 고객을 아직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SAP의 이런 환경은 오라클에 비하면 훨씬 수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라클의 경우 퓨전이 올 초 발표돼 시기적으로도 SAP에 뒤지며, SAP의 경우 자사 제품의 전이(트랜스포메이션)이지만 오라클은 그동안 인수한 제품들 간의 통합과 전이를 동시에 진행해야하는 이중고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이은 인수합병으로 오라클은 기능적으로는 SAP 제품을 압도할 수 있는 베스트 오브 브리드 제품군 포진에 성공했다. 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시험을 앞둔 수험생 신분으로 전락했다. 고객들의 엄정한 심판을 잘 통과해야만 할 것이다.
퓨전을 통해 고객들의 비용과 통합에 대한 불안감 제거에 성공할 경우 세계 최고의 애플리케이션 벤더라는 결실이 기다리겠지만 그 옆에는 엄청난 위기 또한 존재하고 있다.
오라클이 매출과 고객 수에서 SAP를 제쳤다고 축배를 들고 있는 순간, SAP는 오라클이 자충수를 두고 있다고 평가 절하한다. SAP와 오라클의 상반된 전략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이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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