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 이름을 치고 검색을 해봐도 조양규란 이름엔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며 아무 반응이 없다. 간혹 있다면 긴 글 중 이름만 얹어진 정도. 이런 무명의 화가가 지금, 북한의 핵실험 뒤 혼란한 세상에 무지 자주 떠오르곤 한다. 조양규의 그림, <가면을 벗어라>가 눈에 선히 자주 떠오르곤 한다. 그는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넘어간 화가이다. 일본에서 북송선을 타기 전엔 밀항선에 몸을 숨기고 일본 땅으로 훔쳐 들어갔던 인물이기도 하다. 밀항선을 타기 전엔 부산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했었다. 고향 진주에서 진주사범학교를 나왔고 확실친 않지만 제주도 4·3사건과도 연관이 있었다. 조국 남한에 몸을 담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화가로서, 앙가주망 화가로서 일본에 그림귀화를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 일본 사회에도 몸을 맞추지 못하고 끝내 돌아간 곳은 남한이 아닌 북한이다.
'1948년, 반체제자로서 이승만 정부에 쫓기어 일본으로 밀항한 자'라는 일본 측에 기록돼 남아 있다고 한다. 북으로 넘어간 그는 북한에서도 역시 주변인으로만 남았을 뿐 그의 행적과 함께 이름은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 사회에서든 변죽에서만 놀던 이런 그가 무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아마도 그의 뜨거움이었을 것이다. 그의 가슴에서 한시라도 놓지 못했을 그 뜨거움, 따뜻함에 나는 북한이 세계 뉴스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이즈음에 남과 북, 어디에도 몸을 편히 뉠 수 없었던 무명화가가 더욱 저리게 그리워졌던 게다. 조국 한국(남한이든 북한이든)에서와는 달리 사실 조양규는 일본에선 꽤 알려진 화가였다. 전후 1950년대 일본의 주목 받는 화가로서 그의 작품이 동경 국립근대미술관에도 걸려있다고 한다. 교사였던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때는 1945년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말이다.
"일본의 패전을 기화로 해방감과 동시에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림공부도 마침 그 때에 시작한 것이다. 가혹한 현실상황에 견디지 못하고 도피의 길을 택하여, 나의 청년기의 심정은 상처투성이인 채 패전 일본 전후의 사회상황 속에 던져져버렸다. 패배의 상흔을 깊이 새기고 전화로 황폐해진 동경의 구석을 헤매면서, 나는 자기 회복으로서의 갈망에 허덕였다. 1950년, 조국 조선에 전쟁이 일어나 침략자에 의한 민족의 위기를 나 나름의 피부감각으로 받으면서, 표현행위로 최초의 실마리를 겨우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표현기술의 미숙함과 표현형식의 부족함을 극복하여, 조국의 위기를, 더욱이 일본을 기지로 하여 주야를 불문하고 폭탄세례를 퍼붓는 연합군의 미명 아래 감행되고 있는 미 침략자의 잔학성을 폭로하여, 일본 대중에게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념만이 나를 사로잡았다."
여기서 나온 작품이 <조선에 평화를!>이다. 처음 그의 그림의 정신적 바탕은 조국이요 민족이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민중(일본인이든 재일한국인이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암흑을 대비시키며 하층 노동자들의 삶을 담은 <창고>연작에서 북송선을 타기 바로 전엔 급진전하고 있는 일본의 경제발전과 그 뒤의 체제모순을 그려낸 <맨홀> 연작으로 그림으로서 일본사회에 적극참여하게 된다. 결국 일본사회를 비판하고 있지만 단순 구도로 집약한 그림 속에는 다사로움이 짙게 깔려있다. 이 다사로움도 민중 또는 일본 속 이방인으로서의 소외를 극복하지 못하고 또 다른 세계를 찾게 되는데 바로 북한이었다. 화가로서 일본화단에서 잘 나가던 그는 끝내 조국을 선택하게 되지만 고향인 남한의 실정에 더욱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4·19 의거가 발생한 조국에선 이승만 독재의 칼부리에 지극히 사랑하는 민중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적도 아닌 같은 민족의 군인과 경찰들로부터 총을 맞고 죽임을 당한 아들을 부여안고 망연자실해 하는 어머니와 그 옆에서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아버지, 이유도 모르고 얼굴을 가린 채 그저 울부짖어야 만하는 여동생과 총칼로 무장한 가면 쓴 군인들을 눈으로만 저항할 수밖에 없는 남동생을 화가 조양규는, <가면을 벗어라>(사진)라는 100호 짜리 화폭에 담아내었다. 그리고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훌쩍 북한 배를 타게 된다. 민주의 가면에 가려진 독재의 나라, 조국 남한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가면을 벗어라>는 1937년 스페인 내란 당시 피카소가 그의 조국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참혹한 상황을 그린 <게르니카>를 연상케 한다.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한 공격에 게르니카 주민들이 겪어야 하는 전쟁의 잔인성과 죽음의 공포를 그림으로서 표현한 이 걸작은 피카소가 조국에 자유회복이 되지 않는 한 돌려줄 수 없다 하여 조국 땅에 전시되지 못하고 이국 땅, 미국의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무한정 떠돌아야만 했던 작품이어서 사뭇 <가면을 벗어라>와 유사한 점이 많아서다. 다르다면 작가 피카소가 아닌 <게르니카>라는 작품이 제자리에 놓이지 못하고 떠돌았다면 <가면을 벗어라>는 작가인 조양규 스스로가 마음을 한 곳에 정착시키지 못하고 겉돌아야 했던 점이다. 그러나 북한으로 건너간 조양규의 행적은 체코슬로바키아로 1년간 유학을 떠난 이후 북한으로 귀국해 더 이상의 행적을 남기지 못했다. 당시 남한의 상당수 예술가들이 독재정치체제에 부역했어야 했던 것처럼 주체사상 등 개인우상화에 동원된 북한 예술에 조양규가 협조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며 결국 주류 예술가집단으로부터 역시 소외 또는 적대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의 나라, 일본에서 구상화가로서 주목 받던 그는 주변인, 경계인, 아웃사이더로 방황하며 조용히 사라졌을 수도, 사라져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남한도 북한도 선택할 수 없어 결국 중립국 인도를 택해 바다로 떠나던 중 자살하고만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이명준은 바로 조양규 자신이기도 했다. 이명준과 조양규는 북이든 남이든 이 사회를 사는 양심적 소수이며 비타협적인 자들을 대변하고 있다. 이들은 이 사회에서 태어난 아픔이요 가슴은 뜨거우면서도 정을 주지 못하는 비극이기도 하다. 조양규가 북으로 건너간 때도, <광장>이 발표된 때도 1960년이다. 그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나고 있지만 이 땅엔, 이 사회엔 여전히 조양규와 이명준이 존재하고 있다. 이도저도 마땅치 않아 스스로 물러나거나 이도저도 여의치 않아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 양심들이 여직 이 땅엔 존재하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밖이든 안이든 북한의 핵은 우리에게 위협이다 라고만 외친다. 북한의 핵이 자주적 방어수단이며 자강의 최선방책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입장만을 옹호할 수도 없다. 한민족 한반도의 큰 굴레로 포용하자니 우리 민족인 북한 주민들의 인권은 그 포용을 거부하게 만든다. 남한은 엄연한 민주국가요 북한 역시 나라 이름에서 보듯이 민주주의국가다. 형식은 동일하나 내용은 다르다. 같은 점은, 서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가면을 벗어라 하고 말할라치면 조양규처럼 땅을 헤매어야 하고 이명준처럼 바다로 떠돌아야 한다.
오래 전이다. 김대중 정권 때인 칠년 전쯤 된 듯하다. 긴 감옥살이 끝에 30여 년 만에 뜻에 따라 북한으로 돌아가는 비전향장기수, 두 어른이 서울의 한 가정집에 모셔졌다. 나도 그 자리에 엉덩이를 같이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모인 20여 명의 환송객들은 비전향으로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온 두 어른의 삶에 대해 존경심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점점 남한 부정과 북한 옹호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 어른들에 대한 예의이겠거니 하며 경청만 하고 있던 나는 대화에 끼어들게 되었다. 찬양일색의 무조건적 일방통행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에 가지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며 먼저 내 책을 건넸다. 책에는 칠순의 노인에게 드리는 의례적일 수 있을 글을 적었다. 부디 건강하시어 꼭 이 땅에 통일이 되는 날을 보시길 바란다고. 오늘처럼 그 날 다시 우리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오랜 긴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비록 정치가들이 한 만행이지만 남한에 산다는 이유로 저희가 죄송합니다. 이 자리, 이 분위기를 북한에 올라가셔도 오래오래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전 줄곧 화기애애한 이 자리에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북한에선 지금과 같은 이런 모임이 가능할까? 두 분처럼 북한에 갇혀 있으면서 전향을 하지 않은 북한의 비전향장기수가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는 전 날, 북한의 여느 가정에서도 이런 환송회를 해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북한에서도 가능할까요?"
비전향장기수 두 분의 눈만이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게 아니었다. 참석자 모두가 내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앞에 앉아 있던 한 후배는,
"오 선밴, 이 자리에서 할 얘기가 아닌데 별 소릴 다해 분위기를 망치냐?"며 핀잔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요지를 더 얘기해야 했다.
"실상을 정확히 알고 가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북한과 적어도 다른 점, 달라지고 있는 면은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국가보안법 등 여기 남한도 완전한 자유의 나라는 아니지만 이제는 좀 바뀌어 이러한 자리라도 시민 스스로 마련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는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시민의 희생과 힘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겠는지요. 북한에 올라가시면 북한체제에 맞추시기보다는 30여 년 뜻을 굽히지 않은 신념으로 북한에서도 시민, 국민의 역할에 앞서주신다면 이 땅에 통일은 더 빨리 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체제부정 또는 체제순응으로 최고정치인인 사람에게 부역하기보다는 이제 남한과 북한이 진정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바로 오늘과 같은 자리가 있을 수 있게 한 시민의 힘을 북한에서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이젠 후배 한 명만이 아니었다. 썰렁하게 왜 이러느냐고 하더니 급기야 미친 소릴 다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자리는 바로 진정이 되었는데 나를 상대하지 않고 따돌림시킴으로서 이것은 가능했다. 대화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웃음소리도 나고 있었고 나만이 혼자가 되었다. 얘기를 나누는 중에도 비전향장기수 두 어른의 눈은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소외감에 빠져 있던 나는 내 깐에 만회하고자 하나의 제안을 내놨다.
"공책에 주소나 전화번호, 이메일 등 여기 참석자들의 연락처를 적어 이 분들께 선물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통일이 되는 날, 아님 적어도 우편물이나 인터넷으로라도 오갈 수 있게 되는 날에 서로 몸은 떨어져 있어도 소식은 나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 명도 호응하지 않았다. 일언반구도 없이 외면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국가보안법도 모르는 무지한 친구라며 함께 해서는 절대 안 될 친구라고 했단다. 그 후, 어쩌다 우연히 만날 뿐 거의 이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민족문제연구와 관련한 거창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경계인이 아니라 이 사회의 중심인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가면을 쓴 그들에 다시 화가, 조양구의 삶이 회상되니 절로 입에 씁쓸함이 돈다. 다시 소설의 주인공, 이명준이 된 듯 변방인으로서의 어색함에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조양규는 북으로 가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남북으로 분열하여, 남조선에 침략자의 자리가 계속 되는 한 조선의 평화는 없다. 조선에 있어 평화획득의 투쟁이야말로 창작에 관련된 나의 표현자로서의 임무이며, 그때야말로 일본에서의 체험이 내 속에서 강하게 움직일 것을 확신한다."
이랬던 그가 북한에서는 어느 한 마디도 남기질 못했다. 이나마의 자유도 없는 세상, 북한에서 북한의 모순을 또 가까이에서 보았을 것이며 그는 평화획득의 투쟁도 해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이에 타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면을 벗으라던 그가 차마 가면을 쓰며 합류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붓을 던지고 시골로 들어가 살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림을 통한 그의 사회참여는 좌절되고 사회기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남한 역시 조양규 부류의 사회기피자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 오히려 뜻을 같이 할 것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왕따는 더 견딜 수가 없는 일이다. 겉으로 자유의 누림은 늘어나고 있지만 어정쩡하고도 어설픈 자유는 더 완전한 자유의 외침을 더 숨 막히게 하고 더 숨죽여 살라 한다. 과거엔 군인과 독재의 가면이 있었다면 지금은 미완의 민주와 미숙한 평화의 가면이 있을 뿐 가면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 과거엔 억지로 씌워진 강제된 가면이지만 현재의 가면은 우리 스스로가 뒤집어 쓴 자발적인 가면이다. 가면을 벗으라고 삿대질하며 외치던 우리는 서로 가면을 씌워주며 이제 이쯤이면 되었다고 안주하고 있다. 가면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곳. 조양규가 우리의 지금 사회를 그림으로 그려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가 즐겨 그리던 <창고>나 <맨홀>을 넘어선 다른 소재를 찾았을 것이다. 이명준의 바다처럼 조양규는 시골을 그렸지 않았을까. 체득이어야 할 자연이 도피처가 될 순 없다. <광장>에서 보았듯이 도피의 바다는 좌절로서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조양규가 시골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진정 가슴 뜨거웠던 이들이 이 사회를 등지고 떠돌며 체념이라는 더 차가운 가슴으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마 가면을 쓸 순 없는 이들이 설 곳이 점점 좁아져가고 있다. 더 넓은 광장으로 나가고자 했던 이들이 닿은 곳이 좁디좁은 밀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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