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삥땅'이란 말은 들어봤지만 '도중'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는 이들이 많다. '중간에 몰래 가로채기'라는 뜻은 같으나 '삥땅'이 도시말이라면 '도중'은 지방말이라 하면 이해가 쉽겠다. 아마 내가 알기론, '삥땅'이란 말은 시내버스 기사나 안내양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이에 대해 '도중'이란 시외버스 기사나 안내양(주로 남자로 보조 기사였다)들 간에 '삥땅'의 뜻으로 쓰이는 걸로 알고 있다. '도중에 슬쩍 해쳐먹는 짓'으로 이리 부르지 않았을까.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버스마다 운전석 머리 왼쪽 위에 감시 카메라가 붙어 있어 일거수 일투족 비디오로 녹화가 되고 있어 삥땅을 해처먹으려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삥땅'을 막기 위한 갖은 수법이 동원되었었다.
버스 출입 계단에 계수기를 설치해 승객이 오를 때마다 계측을 할 수 있게 함으로서 기사가 내놓는 입금액과 계수기의 수치를 맞추며 운전자나 안내양을 의심했었다. 계수기를 설치하지 못한 버스회사에선 승객으로 가장한 암행승객의 몰래 승객수 셈하기 등의 삥땅소탕전은 다양했다. 여성 안내양이 있었던 시절, 안내양들의 삥땅 점검을 빙자한 알몸수색이 종종 뉴스거리가 되었었다. 당시 대표적 여성인권침해의 경우였다.
하지만 뉴스는 재미거리, 볼거리만을 국민에게 전해줄 뿐, 알몸수색에 대한 어떠한 제재나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었다. 사회적 약자인 안내양의 말을 어느 누구도 편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안내양의 알몸수색은 안내양이란 직업이 이 세상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없어졌다. 여성인권침해는 안내양이라는 직업의 소멸과 함께 이 땅에서 막아낼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아주 오래 전, 시외버스의 '도중'을 집중 취재한 어느 월간지의 기사가 요즘 뉴스를 보며 다시 새롭게 떠올랐다. 전 중앙일보 사장인 홍석현 씨(전 주미대사이기도 하다)가 삼성에서 받은 불법정치자금을 받아 1997년 당시 이회창 대통령 후보 측에 전달하지 않고 중간에 '삥땅'을 쳤다 하여 '삥땅'이란 단어가 한창 회자되고 있어서다. 하도 오래된 기사라서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분명한 부분은 이렇다.
운전기사와 보조기사들의 '중도'(중간 가로채기)를 막을 요량으로 한 시외버스회사에선 몰래 손님을 가장한 잠입 아르바이트 직원을 썼다. 박봉의 월급에다가 먼 거리를 운행하니 입금액을 곧이곧대로 회사 측에 바치는 기사는 거의 드물었다고 한다. 잠입계수 임시직 직원과 버스기사의 입금액이 틀려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하며 말썽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옳은가 알 길이 없었다.
회사 측에선 당연히 버스기사를 의심하고 그 차액을 월급에서 무조건 공제했다. 더욱이 잠입계수 임시직은 정규직도 아닌데다가 기본급조차 없었다. 수입은 적발수익금의 일부가 그들의 월급이 되었다. 이를테면 리베이트로 먹고 사는 불안정한 노동자다 보니 부풀려 신고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신고액이 바로 자기 수입이 되니 말이다. 기사의 항의는 매일 멱살잡이로 이어졌다. 결국 칼부림까지 나기도 했다.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로 억울한 자가 있기 마련이다. 성실한 운전자는 늘 피해를 입었다.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나 볼 수 있듯이 큰소리치는 자들은 손해를 보지 않는다. 성실한 자는 성실하다는 이유로 또 피해를 보고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된다. 회사에 항의하다가 결국 직장을 잃고 퇴직금도 뜯긴 한 운전자가 억울하다며 자살했다는 기사였다.
어떻든 간에 박봉의 노동자인 버스운전기사들의 '삥땅'이나 '도중'은 비록 탈법이긴 하지만 액수도 그리 크지 않을 뿐 아니라 부귀영화를 얻기 위한 착복이 아닌 어쩌면 생존을 위한 좀도적질이었다. 이래서 우린 '갈취'나 '사기'나 '도둑질'이라 하지 않고 어감은 좋지 않지만 법적 용어가 아닌 말로 이들의 행위를 어감으로 비하하는 수준에서 가볍게 넘겨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 전 중앙일보 사장이며 전 주미대사인 홍석현 씨가 삼성과 이회창 씨 사이 중간에서 슬쩍 했다고 전해지는 액수는 '삥땅'이나 '도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액수여서 왠지 적절하거나 적합한 표현이 못 된다는 지적을 하고 싶다. 적어도 드러난 30억이란 숫자는 '삥땅'이라 여길 수 없고 '생존'으로도 도저히 곱게 봐줄 수가 없다. '탈취' 또는 '착복'이요 '탐욕'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천억 대 부자가 고작 30억을 가로 챘겠느냐 라는 홍 씨 측에서 하는 얘기는 더 가관이다.
천억 대 30억의 비교치로 따진다면야 그 '삥땅액'은 껌값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국민의 일반상식으로 가름하면 그 액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임에 틀림없다. 그에게 있어 30억은 정치자금을 남모르게 건네줬다는 그가 살던 강남 압구정동의 아파트 한 채 값에도 미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돈이라면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이 6만 명을 1년 동안 먹일 수가 있다. 6만 명의 생명을 살릴 수가 있는 엄청남 거액이다(1인당 1주일에 약 천 원의 식음료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니 홍 석현 씨의 '삥땅'은 결코 적절한 표현의 보도라고 할 수가 없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언론 쪽에선 아마도 '삥땅'의 다른 어감, 즉 이미지로서 굳이 그 가로채기의 의미를 강조하려 한 게 아니었을까 사료되는 바, 삥땅은 '야비함' 또는 '치졸함'으로도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질 않은가. 신문은 사회의 공기라며 제 중앙일보를 변호하던 자가 바로 홍석현, 그였고, 그는 세계신문협회 회장직도 연임한 자로 주미대사로 만족치 않고 스스로 차기 유엔사무총장 자리도 넘겨보던 자였다. 이런 허울 그럴듯한 자가 기껏 한다는 짓이 삥땅이라니. 소매치기와 비견되는 삥땅이라니.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요즘 버스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후론 삥땅이란 말도 사라져 최근 듣기 힘들다가 홍석현 씨의 정치자금 배달사고로 다시 들으려니 세상이 뒤로 후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삥땅은 마치 30년 전 추억의 불량식품을 인사동 거리에서 다시 보듯이 옛 추억의 물건을 파는 상점에서나 들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언론인이자 기업가이자 외교관이자 친일파 아버지에 한국 최대 재벌의 처남 등등 이력서 한 장으로도 부족할 소위 삐까뻔쩍한(?) 이력을 가진 홍 씨의 삥땅을 보고 있자니, 전혀 걸맞지 않은 낡고 빛바랜 검정색 중학교 교복을 그가 입고 TV에 출연한 '봉숭아 학당'을 보는 듯해 배를 쥐고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자가용만 타고 다니는 나는 삥땅을 치고 싶어도 못하잖아? 어떻게 했는지 아니? 내 차 운전기사 월급을 아빠한테 받아서 기사에게 건네주기 전에 봉투에서 슬쩍 했지."
"운전기사가 뭐라 하지 않았어?"
"그랬다간 모가지인 걸, 헤헤. 아빠한텐 월급봉투 전달 심부름 값도 따로 받았으니까, 꿩 먹고 알 먹고. 이젠 엄마가 교장선생님에게 주는 촌지, 중간에서 내가 삥땅 치지롱. 나만큼 통 크게 삥땅 해먹는 놈 있으면 나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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