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스페인의 대지주인 마르셀리노 산스는 석기와 뼈로 만든 조각과 장식품을 보고난 뒤 깊은 감명을 받고 자기 소유의 땅을 파보기로 한다. 몇 년 전 사냥꾼들이 우연히 발견한 제 땅 안의 동굴에서도 고대 유물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동굴을 둘러볼 때마다 그는 자기의 아홉 살 난 딸을 데리고 갔다. 그 해 어느 날, 어른의 키로는 감히 들어가 보지 못할 낮은 동굴 속을 돌아다니던 키 작은 딸아이가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빠, 저 안에 소가 들어 있어요."
따라 들어간 마르셀리노 산스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굴 벽에 그려진 십여 마리의 소들이 살아있는 듯 정교했기 때문이다. 곧 이를 세상에 알렸지만 그는 세상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사기꾼으로까지 몰렸다. 그 벽화를 고고학자들이 가짜라고 판명해서였다. 마르셀리노 산스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홉 살이었던 그의 딸 마리아가 서른 세 살이 된 1902년, 동굴의 벽화는 진짜이며 기원전 1만 5천년 경으로 추정된 인류 최고(最古)의 그림임이 인정되었다. 바로 그 유명한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다. 가짜라고 판정했던 고고학자들은 마리아에게 사죄문을 공표하며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촌극을 보였었다. 아홉 살 어린이의 이 위대한 발견은 어린이였기에 가능했다고도 한다. 벽화가 잘 보이도록 바닥을 팠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촬영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동굴은 매우 좁고 낮은 곳이었다. 또 어른들의 시각이나 지식으로 볼 때 도저히 고대의 그림으로 여기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나 선명하고 정교하며 사실적이었다. 어른들의 지식이나 상식으로는 원시인의 그림이 유치해야 하고 단순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보관이 잘 돼있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으로 거의 정확하다고 보는 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하면 약 1만 5천년에서 3만년까지 그 그림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학예회에 출품된 어린이들의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문득 책에서 읽은, 알타미라의 동굴벽화를 발견한 아홉 살의 꼬마 여자아이를 떠올리게 된 건 왜일까? 비좁은 공간에서 몸집 작은 아이만이 가능했던 발견을 단지 어른과 아이의 외형의 크기 차이에 의한 단순한 발견으로 흘겨볼 수만은 없다. 고고학자는 그들의 지식을 다 동원해 가짜라고 단정을 했었다. 어설픈 지식은 때로는 진실을 가리는 가림막이 되기도 한다는 말은 여기선 옳다. 아이의 눈은 순수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았던 것이다. 지식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인간의 잣대로 덧씌우거나 깎아 내린다. 아이의 발견은 놀라 뛰어나오면서 단지 소가 안에 들어 있다는 말 한마디의 외침이었다. 하지만 학예회의 비슷한 또래 아이의 그림들에선 이러한 아이다운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어른으로 다듬어진 예쁜 그림뿐이었다. 교육에 의해 모양 좋게 가꾸어진 다들 잘 그린 그림밖에 없었다. 이 그림이나 저 그림이나 다 엇비슷하다. 모두 그럴듯하게 잘 그렸지만 몽땅 똑같은 복사품이었다. 이렇게 추려진 그림만이 학예회의 대표작으로 모셔진다.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물었다. 네 그림은 붙어있지 않더라? 아들의 대답은,
"난 그림을 못 그리잖아. 그림 잘 그리는 애들은 쓱싹 얼마나 쉽게 잘 그리는데. 그 애들은 늘 칭찬을 받지만 난 그림으로 칭찬을 받은 적이 없어."
보여 달라해도 끝내 보여주질 않는다. 주눅이 잔뜩 들어있었던 게다. 오랜만에 몰래 훔쳐봤다. 정말 형편없었다. 4절지 큰 도화지에 그려진 나비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로 아주 작게 그려져 있었다. 나머지는 다 여백이다. 도화지 안을 가득 채워 크게 그리라고 배웠었던가. 그래야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들었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아들 그림은 정말 빵점 짜리 그림이다. 여기에다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려고 아주 사실적으로 그린 흔적이 보인다. 배우기를, 굳이 형태를 다 보여주려 하지 말라고 했었던가. 또 이 기준으로 평가하면 훔쳐본 아들의 그림은 그림 축에 들지도 못한다. 이래서였구나 싶다. 그림 잘 그리는 친구는 도화지 전체에다 큼직하게 그것도 쓱싹 그려내는데 비해 자기는 고작 조그맣게 그리면서도 한참을 걸렸을 테니 비교가 되었겠다. 자기는 그림에 재주가 없다고. 움찔해지고 감추고만 싶었을 게다. 불현듯 떠오른다. 한 아이에게 코끼리를 그려 보라 했더니 큰 도화지 한 장에 거의 같은 색만을 그려대더란다. '코끼리를 그리라니까' 하며 엄마는 다그쳤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단다. 자폐증세가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병원을 찾았다. 의사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던 중 우연하게 아이가 그린 그림들을 한데 모아 붙여보니 코끼리 다리가 나오질 않는가. 앗, 엄마와 의사인 어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의 눈은 가감없이 코끼리를 그대로 그려야 했다. 그래서 도화지 한 장으론 그 거대한 코끼리를 다 넣질 못했던 게다. 코끼리는 코끼리만하게 그려야 했기에. 아들도 비슷한 경우다. 나비는 제 눈에 나비만하게 보였고 그렇게 보이는 대로 그렸을 뿐이다. 단지 미술적으로 사물을 확대해서 보지 못하거나 상상이 부족한지는 모르나 아들이 그림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돼 아주 다행이다. 단지 미술학원비를 대줄 수 없는 아빠의 경제적 능력을 탓해야 했다. 그러나, 지식이 잘못 과하면 진실을 가리듯이 부족(不足)은 오히려 솔직해질 수가 있는 것. 아들은 아이답게 순수하고 솔직했을 뿐 어른처럼 흉내내고 있지는 않았다. 학예회의 그림들을 보며 알타미라의 동굴벽화를 발견한 꼬마 여자아이를 떠올린 건 상반된 경우지만 전혀 별개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이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은 아이들을 어른으로써 잣대질하려 든다.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는 말은 수없이 하면서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어른스러운 아이가 똑똑한 애 취급받는 세상이다. 똑똑함과 영악함은 분명 분별되어야 한다. 어른이 뭐 그리 좋다고 서둘러 제 자식을 어른으로 만들려 하는지, 참. 나는 눈높이라는 어른들의 상술을 들이대고 순수한 아이들을 잣대질하려 드는 어른을 향해 삿대질하는 아이들이 조만간에 생겨날 거라고 두려움 섞인 기대감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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