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숙이는 작년 이맘때를 생각하였다.
아침상을 비운 그이가,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말숙이 귀빠진 날이군. 저녁 때 영화라도 한편 볼까?"
말숙이는 뛸 듯이 기뻤었다. 사실 결혼한 지 햇수로는 2년이 되었지만, 결혼 후 처음 맞는 말숙이의 생일이었다. 데이트 시절에도 길동이는 그 날을 잊지 않고 보통 때 이상으로 말숙이의 기분을 미리 챙겨주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말숙이는 길동이를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자상한 그이를 위해서라면 무어든 못할 게 없다는 식으로 눈물나리만큼 감동을 그 작은 고마움에서 늘 느껴왔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대개의 남자들이 그런 로맨스에 대해 차츰 무뎌져간다는 사실을 미리 결혼한 여러 친구들의 불만을 자주 들어온 터라, 말숙이의 생일기념 이벤트에 대한 기대는 여느 때보다 컸다. 내 남편은 너희 남편관 달라 하며...
그러나, 그런 후로 또 1년이 지난 오늘, 길동이는 오히려 반찬 투정을 하고는 회사로 출근을 하였다. 작년의 그 감동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던 말숙이었기 때문에 오늘도 길동이로부터의 저녁 외식 정도는 당연히 기대했건만, 그런 얘기는 커녕 한푼이라도 아껴야 하는데 웬 여자 살림살이가 이리 헤프냐고, 오늘따라 좀 더 푸짐하게 정성들여 만들어 논 매운탕에다 불평만 잔뜩 퍼붓고 집을 나섰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나서 말숙이는 길동이의 출근길을 내다보지도 않고 이내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러웠다. 내 사랑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느냐며 한탄은 체념에까지 이른다. 그 흔한 사랑이라 해도 남과는 분명 다를 줄 알았고 그렇게만 믿어왔던 믿음이 깨지자 입 밖으로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남들처럼 나도 2년 만에 환상이 깨지고 마는 건가?
'그럼 그렇지.'
남들은 다 그러더라도 길동이만은 그 마음이 변치 않을 줄로만 알았던 신의의 무너짐을 가슴으로 갑갑해하며 그 서러움을 달리 달랠 수가 없어 이불 속에서 내내 입술을 깨물며, '그럼 그렇지, 그럼 그렇지.'를 여러 번 되씹어댈 뿐이었다. 내 남편이라고 별 수 있어?
그러나, 어쩌겠는가. 곁에는 이제 백일을 갓 넘긴 혜미가 아직 아침잠에서 깨지 못하고 곤히 자고 있고, 이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이불 속의 제 모습이 철없는 행동으로 보일 뿐이었다. 이 아이를 놔두고 저녁 데이트할 만큼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닌 것을... 이렇게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는 이내 뒤집어 쓴 이불을 털고 나와야 했다.
아빠가 혜미에게 뽀뽀도 않고 회사로 나갔구나 싶어 이 일로 대신 투정을 부려나 볼까 하고 회사에 전화를 걸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자존심이 울컥 가슴 위로 치밀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부아가 일었다. 그러나, 처녀 때처럼 아양이라도 떨어볼라치면, 그녀가 입고 있는 몸빼바지 같은 옷차림이 비웃듯 '넌, 주부야!'하고 기분 나쁘게 일깨워주고 마는 것이다. 스란치마도 입는 처지에 따라 파티복이 될 수 있고 월남치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딸, 혜미를 얻고 이대로 아줌마는 되지 않을 거야 했건만 현실은 그리 마음으로만 잡아두지 않았다. 제 모습을 둘러보고 치장하려는 마음이야 여전했지만 시간이며 여건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자기보다는 아이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더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자기 대신 가족이 먼저였고 자기는 가족 다음도 아니어서 아무리 챙겨도 또 늘 부족한 게 가족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살아왔건만...' 하여튼 길동이가 종일토록 원망스러웠던 하루였다.
'내 결혼은 이제 엉망이 되었어. 내 인생은 이제 끝났어.'
김이 모락모락 나던 매운탕도 어느 새 식어 냄비마저 차가웠다. 사춘기 때도 느끼지 못한 울컥한 서글픔이 북받쳐 올라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젊어 한 푼이라도 모으자며 허리 움켜쥐고 사는, 그래도 알뜰한 남편에 가슴이 또 한번 울컥 시리도록 저려왔다. 진종일 마음이 오락가락 뒤숭숭한 하루였다.
"웬일이세요? 어머님."
저녁 6시가 다 되어서 시어머님이 찾아오셨다. 하루 내내 기분이 언짢아 집안 청소도 대충 해놓은 터라 말숙이는 무척 당황하였다.
"혜미 내게 주고 나가봐라."
"예? 어딜요?"
"다 키워놨더니 제 지집만... 아니다. 그저 해본 소리구... 어디라하더라? 회사 앞 다방인가 찻집인가 하는 데로 나오라더라. 장가가서 집안 일을 꾸리다보면 잊을 건 적당히 잊고 사는 게지, 기념 따위는 무슨..."
혜미는 걱정 말고 맛있는 것 사 달라 해서 많이 먹고 들어오라시는 어머님의 모습에서 그제야 뜻을 알아차리고 어머니를 꼭 빼닮은 길동이의 천진하기까지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당황해 하는 말숙이에게 어머니는 서둘지 않고 뭐하느냐며 오늘은 길동이가 좋아하는 분홍빛 니트 원피스를 입고 나가라고까지 거들어주신다.
사람이 왜 이리 짓궂나. 오늘 아침 같으면 서러워 정말 얼굴조차 면전에서 보기도 싫을 그였지만, 이제 곧 만나면 능청맞은 웃음으로, '오늘 아침, 미안해.'하고 나올 길동이를 미리 생각해보니 말숙은 그저 실없이 눈물 섞인 웃음만 절로 나왔다.
서둘러 사글셋방 쪽문을 나오면서, 말숙이는 곧 만날 길동의 얼굴을 떠올리며 또 한번 피식 웃고 말았다. 궁핍해도 궁색한 티는 내지 않고 사는 길동의 해죽한 웃음을 첫 인상으로 고이 간직하며 그 웃음이야말로 바로 우리 가족의 미래며 꿈이라며 든든해하던 말숙이의 얼굴도 히죽거리고 있었다. 부부는 닮아간다 했는가.
'그럼 그렇지, 그럼 그렇지.'
너도 별 수 있어? 하던 아침의 그 체념의 언어는 지금은 더없는 행복의 대사로 바뀌어 그녀를 절로 웃게 하고 있었다. 절망으로 하루를 텅 비게 한 가슴을 순식간에 소망으로 확 채워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럼 그렇지.'
내 남편은 역시 달라 라며 제 남편, 길동이가 너무나 예쁘고 미더웠다. 신혼살이로 굵어진 두 팔뚝을 '앗싸!' 하듯 힘있게 번쩍 치켜들며 뛰어나오는 말숙에게로,
"혜미는 걱정 말고 오랜만에 맘껏 너희 시간 보내고 오렴."
시어머니가 흥을 더 돋군다. 길동에게로 달려가는 말숙의 입에선 연신 '그럼 그렇지, 그럼 그렇지'가 연발하고 있었다.
올 한해를 교수들은 「밀운불우(密雲不雨)」라는 사자성어로 대신했다고 합니다. 검은 먹구름만 가득할 뿐 비는 쏟아지지 않은 답답한 현실을 함축하고 있지만, 이 밀운불우는 미래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먹구름은 바람으로 그저 흩어져 사라지고 말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폭우로 쏟아져 내릴 것이요 홍수로 이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다 쓸어버릴 거라는 말입니다. 비가 온 뒤가 더 걱정입니다. 단지 하늘에 담아두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니 하늘만 바라보고 하늘의 동정에 눈을 맞춰 눈치 보듯 처신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사람인지라 하늘에만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겐 여타의 자연과 달리 '의지'라는 선물을 하늘로부터 받았습니다. 사람사회엔 머피의 법칙이 있다면 샐리의 법칙도 있습니다. 택시를 잡으려고 기다립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길 건너편에 빈 차가 올 뿐 내게로 오지 않습니다. 이래서 길을 건넜습니다. 이랬더니 이젠 방금 전에 있던 건너편에 택시가 자주 옵니다. '아, 난 내가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지?' 잘 아는 머피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같이 택시를 잡던 길 건너편의 누군가에겐 샐리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남들은 다 잘 되는 것 같은데...' 같은 상황에서도 나는 머피 또는 샐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을 것이요, 받아들이기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능동적 또는 피동적 자세에 의해 같은 상황은 전혀 다르게 바뀔 수도 있습니다. 바로 '자기의지'에 따라서 입니다. 어려울수록 의타심이 더 생겨난다고 하지만 남에 의존은 의타심을 더 키울 뿐입니다. 하늘의 먹구름을 걱정만 하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겐 아주 큰 선물인 '의지'를 모두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문득 '그럼 그렇지' 이 한 마디가 떠올랐습니다. 내 입에서 뱉어지는 같은 '그럼 그렇지'도 긍정, 부정으로 현격히 나눠집니다. 우리, 긍정의 '그럼 그렇지'를 새기고 대뇌이며 올 한해를 맞이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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