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뒷모습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아주 오래 전부터 보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등을 의식적으로 피하는데…
아버지의 등에 업힌 아이가 한없이 부러웠고 목마를 탄 아이는 더 우러러보였다. 아버지의 등은 내겐 언제나 빈자리였다. 우리 세대가 아닌 아버지 세대에선 등에 업어주고 목마를 태워준 아버지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등은 시렸다. 손 한번 잡아주지 않은 아버지가 등을 내놓으실 일은 더구나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던가, 태권도를 한달도 채 배우지 않았지만 오기는 1단이요 자만은 한 3단은 된 듯이 날뛰었다. 엄마더러 팔을 쭉 펴서 들어보라 하고는 그 엄마손까지 내 발이 미칠 것이라며 장담을 한 뒤 어머니 앞에 저만치 떨어져서는 냅다 달려 발을 한껏 치켜 쳐올렸다. 엄마 손바닥에 내 오른발 엄지발가락 끝이 가까스로 닿긴 했지만 몸이 허공에서 한바퀴 휭 돌더니 곧바로 바닥에 곤두박질쳤고 안방 마루에 얼굴을 내리꽂고 말았다. 윗 앞니가 아랫입술을 뚫고 나오며 피가 이미 흥건히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내 나를 들춰 업고 병원으로 달렸다. 울음도 나오지 않을 만큼 아픈 통증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따뜻한 온기가 등을 타고 내 가슴으로 전해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치료가 끝나고 한시름 놓은 엄마는 다시 나를 당신의 등에 업었다.
"상처가 평생 갈 거 같구나. 이쁜 내 아들 녀석 얼굴에 엄마가 무뎌 상처를 내고 말았으니… 아프지? 많이?"
까불다가 다친 거라며 엄마한테 무지 혼이 날 줄 알았는데 엄마가 상처 낸 거라며 미안해 하니 이건 무슨 경운가 싶었지만 그 순간에도 엄마의 등은 아주 따스했다.
"엄마 힘 안 들어? 걸을 순 있는데…"
계면쩍게 말 뒤끝을 흐렸던 건 계속 엄마등에 업혀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등은 내겐 너무나 편안한 의자였다. 힘이 더 들 줄 알면서도 내 체중을 엄마의 등에 몽땅 다 맡겼다. 이미 등에서 잠이 든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곯아떨어졌다. 한참 뒤에야 부스스 눈을 떠보니 엄마가 곁에서 내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계셨다. 나는 이내 눈을 다시 감았다. 제정신이 들고나면 이젠 혼날 차례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엄마의 동정을 살펴보려고 눈치 채이지 않을 만큼 최소한 가는 눈을 떠보았다. 돌려 앉은 엄마는 아마도 이마로 흐르는 당신의 땀을 훔쳐내고 있으셨던가 보다. 나는 이때 본 엄마의 등을 훗날 언제고 잊어본 적이 없다. 당시 엄마는 살이 찐 편이 아니어서 넓진 않았지만 내겐 가없이 넓은 등이었다. 다 담아주는 위로의 가슴이었고 어느 무엇보다도 든든한 위안의 말이었다. 아버지에겐 많이도 따져댔던 나였지만 어머니의 등을 몰래 훔쳐본 뒤로는 어머니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엄마, 미안해!"
"깼구나. 아니다. 많이 아프지? 상처는 오래 남을 거라던데 얼굴에 난 상처로 이 엄말 원망 많이 하겠구나. 미안하다."
사십년 가까이 지난 아직도 아랫입술에 남은 딱딱한 상처로 엄마의 보드라운 등과 함께 그때 일을 지금인 양 추억하는데 원망은커녕 상처를 볼 때마다 그때의 다감한 엄마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고 따뜻했던 엄마의 등을 느껴볼 수 있게 해준다. 아랫입술의 딱딱해진 상처를 혀와 이로 더듬으며 나이 오십, 지금도 어머니를 느끼곤 한다.
초등학교 시절, 시월 국군의 날이면 매년 한강 위에서 에어쇼를 했었다. 우리 가족은 여느 가족들처럼 남산에서 전투기들이 펼치는 공중쇼를 보곤 했었는데 1년 중 우리 집의 유일한 가족외출이었다. 인파에 떠밀려 우리 가족은 나란히 앉질 못하고 앞뒤로 앉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의 등을 처음 보았다. 마침 아버지 또래의 다른 아버지가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우리 앞을 비집고 지나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어린 아이는 시장통 같이 시끌벅적한 임시 관람석 속에서도 제 아버지 등에 업혀 소근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편할까? 저 꼬마는. 얼마나 따뜻할까? 아빠의 등이. 나도 아빠 등에 업힌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버지의 등은 바로 눈 앞에 있었다. 한강 위 공중에선 처음 보는 비행기들이 종이비행기마냥 뒤집어지고 곤두박질치듯 묘기를 부리고 있었지만 난 비행기의 기교보다는 아버지의 등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업혀봤으면 하는 단순한 바람으로. 그러나 난 '아버지 저 좀 업어줘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절대 들어줄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말이나 해볼 걸, 지금 후회하지 말고… 다 지난 뒤에야 뭔들 못하겠나. 아버지는 늘 어려웠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아버지는 내게 등을 또 보였다. 지하상가를 사업으로 크게 꾸리고 계셨는데 이른 아침 상가에 불이 나고 말았다. 그 때가 아마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던 걸로 아는데 연말 대목 때라 상가 안엔 짐들을 수북이 쌓아놓고 있었다. 이발을 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화재소식을 듣고는 이발을 하다 말고 상가로 뛰어가셨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상가 안 지하로 들어갔다.
"아버지, 더 들어가시면 큰 일 나겠어요. 그만 나가야해요."
지하 속은 자욱한 연기로 앞이 전혀 보이진 않았지만 연기 건너편에서 타는 소리가 마치 탱크가 굴러오는 것처럼 요란하게 울려서 들려왔다. 그 무서운 불덩이도 만져지지도 않는 말랑한 연기에 가려져 붉은 불덩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타는 소리만이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경황은 불이 보일 리 없었다. 제지하는 내 말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황급히 연기 속으로, 아니 보이지 않는 불덩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아버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지 하나, 난 아버지의 등을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아버지 더 들어가면 큰 일 납니다, 아버지는 어깨와 무릎을 주저앉히며 들릴 듯 말 듯 '안 되는데, 안 되는데'를 연거푸 토해내고 계셨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런 낙담을 본 적이 없다. 거의 포기해야 할 사업을 동업자들이 다 떠나고 난 뒤 2년 사이 아버지 혼자서 일궈내셨기에 아버지의 탄식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방금 전 불덩이에라도 달려 들어갈 것 같던 등에선 거친 요동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울음보다는 아마 떨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여기서 끝나다니' 근근이 잡고 있던 희망을 내려놔야 하는, 무너지는 가슴에 떨고 있는 듯했었다. 가까스로 지하에서 빠져 나와 진화를 독촉하기 위해 소방차로 가시던 아버지의 등은 좀 전 불덩이 앞에서 그 불굴했던 등과는 전혀 달라보였다. 굽어 있었고 포기하고 있었다. 그 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 받게 되었고 아버지는 겉돌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남기신 일기장 한 권을 들고 왔다
모년 모일, '終日 本家'
'종일 본가'란
하루 온종일 집에만 계셨다는 이야기다
이 '종일 본가'가
전체의 팔 할이 넘는 일기장을 뒤적이며
해 저문 저녁
침침한 눈으로 돋보기를 끼시고
그 날도 어제처럼
'종일 본가'를 쓰셨을
아버님의 고독한 노년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일부러 '종일 본가'를 해보며
일기장의 그 말할 수 없이 적적하던 심정을
혼자 곰곰이 헤아려보는 것이다
시인 이동순의 아버지는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나 때문에 장가 시집도 못 가니…, 하시며 혼기를 놓친 형과 큰 누나를 걱정하시던 아버지가 몇 년 뒤 누나가 시집을 가고 신혼살림 집에 처음 가족집들이 겸 들렀을 때,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그 날은 유난히 더 말씀이 없었다. 뉘엿뉘엿 해그림자로 아파트가 바닥에 뉘고 있을 스산한 저녁 무렵 누나 집을 나온 우리는 재미있게 사는데?, 잘 살아라, 또 자주 보자, 는 둥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아버지는 길 건너 저만치에서 혼자 걷고 계셨다. 어둑한 분위가 가물가물하지만 건너 걷고 계신 아버지는 얼굴로 연신 손을 올리고 있었다. 방금 전 집에서 "집 좋구만." 하시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 눈물을 우리 모르게 훔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저만치 떨어져 가시는 아버지의 등이 그토록 시렸는지 가슴이 저릿해 와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왜 저러시니? 이 좋은 날에?"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거지."
내 기억에 아버지는 내게 등을 이처럼 세 번 보여주셨다. 업히고 싶어도 업힐 수 없어 아버지 등을 보며 남의 아버지 등이 그리도 무지 부러웠었고, 늘 강철 같기만 할 것 같던 아버지의 등이 스르르 무너지는 순간의 무력감에 한없이 마음이 안쓰러웠고, 자식에게 보이고 싶지 않던 눈물을 흘리시던 회한의 등에 그지없이 가슴이 시렸었다. 차마 보기 힘든 아버지의 등인지라 눈으로라도 의식적으로 피해야 했다. 아버지는 등으로 먼저 늙어가셨다. 이러할 등이라면 진작 우리에게 넉넉히나 베푸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나보다 반 뼘 더 키가 훤칠하게 크게 자란 다 큰 아들의 등에 장난스럽게 업혀보곤 하는데, 업어줄까? 하면, 아들은 이제 난 어린애가 아닙니다, 며 거절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날 업어주겠다고 한다. 다행이다. 난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전혀 망설임 없이 아이 등에 업혀버린다. 이젠 아이 등이 어머니 등처럼 따뜻하게 내 가슴속에 저미어든다. 아이는 제 등으로 아빠의 가슴을 느끼긴 하는 걸까? 내 등이 내 아이에겐 내 아버지의 등처럼 시리진 않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등으로 아버지가 늙었음을 알게 했듯이 내 아이에게 언젠가는 그런 아버지의 등을 나도 보일 날이 있겠지? 등을 당당하게 보일 수 있는, 언제나 든든한 아버지면 좋으련만 어디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되는 건가? 세월이.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세월이 아무리 나를 붙들어도 베풀 게 남들처럼 그리 많진 않아도 등 하나만은 네게 언제라도 내줄 수 있는 등이 넉넉한 아버지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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